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건물마다 에어컨 실외기가 없으니까 도시가 훨씬 깔끔하더라." 그런데 그게 아름다움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금, 그 도시들이 40도를 넘기는 여름을 처음 맞이하고 있다면? 유럽 에어컨 논쟁은 단순한 냉방 문제가 아니다. 기후·환경·정치가 한꺼번에 뒤엉킨 이슈다.
6월에 44도 — 유럽인들이 처음 보는 숫자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유럽도 여름엔 덥다" 수준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가 약 40도, 보르도 42도, 피소스라는 지역은 44.3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한여름 절정기에도 서울에서 40도를 보기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이 숫자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감이 온다. 더 충격적인 건 시점이다. 이 더위가 7~8월이 아니라 6월에 찍혔다. 게다가 5월 중순까지는 시원했는데, 불과 2주 만에 이 기온으로 치솟았다. 프랑스 서부 지역의 현재 기온은 평년 대비 12.5~15도 높다. 평소 26~28도 하던 도시가 갑자기 43~44도가 된 것이다. 독일도 역대 최고 기온을 갈아치웠다. 41.3도. 독일은 위도 기준으로 만주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나라다. 영국은 37.1도, 벨기에·네덜란드·체코·오스트리아·세르비아도 일제히 자국 최고 기온 기록을 경신했거나 경신 예정이다. 유럽 수백 곳이 6월 기준 역대 최고 기온을 동시에 갱신하고 있다. 40도가 넘으면 밖에 나가면 안 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적색 폭염 경보가 발령됐고, 대부분 학교가 휴교 또는 단축 수업에 들어갔다. 너무 더우니 물에 뛰어드는 사람이 늘었고, 프랑스에서만 40명 이상이 익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40도는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유럽에 에어컨이 없는 이유 — 아름다움이 아니라 필요가 없었다
유럽의 에어컨 보급률은 현재 약 20%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한 자릿수였다. 우리나라가 90%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없다"는 수준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위도 기준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독일은 몽골보다 북쪽, 영국·프랑스는 만주와 위도가 비슷하다. 원래라면 엄청나게 추운 지역인데, 대서양 난류 덕분에 그나마 살 만한 기후가 유지돼 왔다. 유럽 건물들을 보면 이 사실이 바로 드러난다. 외벽이 두껍고, 창문은 좁고 길다. 건물 사이 간격도 좁아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벽돌로 가득한 구조다. 추위를 막도록 설계된 건물이라 더위에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에어컨 실외기를 달 자리도 마땅치 않고,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외관 변경 자체가 법으로 금지된 경우도 많다. 여기에 유럽 특유의 환경 의식이 더해졌다. 특히 프랑스 환경 운동 진영은 에어컨을 "기후변화에 대한 최악의 해결책"으로 규정하고, 사용 반대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 왔다. 에어컨은 전기를 많이 소비하고, 그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소가 나온다는 논리다. 에어컨을 많이 쓰는 미국이나 한국·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건 오래된 일이다. 그 비판의 중심에 유럽이 있었다.
40도 앞에서 환경당도 입장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40도가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프랑스에서는 에어컨 설치 문제가 정치 논쟁으로 번졌다. 좌파 성향 정당에서는 "어디에나 에어컨을 설치해선 안 된다, 병원이나 꼭 필요한 공공시설에만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우파 진영이 맞받아쳤다. "정치인들은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국민들은 무더위에 시달리라는 거냐? 엘리제궁부터 에어컨 끄라." 환경에 가장 진심인 집단으로 꼽히는 프랑스 환경당 대표마저도 이렇게 말했다. "에어컨 없이는 도저히 안 되는 곳들이 있다." 40도를 넘어가면 어떡하냐는 현실 앞에, 오랫동안 지켜온 '에어컨 금기'가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 노동부 장관도 공식 발언했다. "프랑스가 더운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회는 이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이 말은 유럽이 지금껏 유지해온 에어컨에 대한 인식이 사실상 바뀌기 시작했다는 공식 선언에 가깝다. 실제로 지금 유럽에서는 에어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에어컨 모먼트"라는 말까지 나온다. 오랫동안 에어컨 없이 살았던 대륙이, 한 달 만에 달아오른 기온 앞에 손을 들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더워지는 이유
단순히 올여름이 유독 더운 걸까.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다. 유럽은 전 세계 모든 대륙 중에서 가장 빠르게 더워지고 있는 지역이다. 기후 협약에서 "1.5도를 넘지 말자"고 할 때, 유럽은 이미 평균 대비 3도 가까이 상승했다. 전 지구 평균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 중이다. 이유가 있다. 유럽 북쪽에 있는 북극이 가장 빠르게 더워지고 있고, 북극 바로 아래에 유럽이 있다. 북극해가 뜨거워지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이 그린란드와 유럽이다. 여기에 더해 유럽을 감싸는 바다가 동시에 달아오르고 있다. 서쪽의 북대서양, 남쪽의 지중해 모두 이상 열파 상태다. 특히 지중해가 문제다. 지중해는 대양과의 연결 통로가 폭 14km의 지브롤터 해협뿐이다. 사실상 '욕조'처럼 물이 갇혀 있는 구조다. 물은 비열이 높아 한번 뜨거워지면 쉽게 식지 않는다. 현재 지중해 수온은 평년보다 3~5도 높고, 프랑스 남부 해안 인근은 평소보다 6도나 높다는 측정값이 나왔다. 연구자들은 경고한다. 7~8월 폭염이 계속된다면 지중해 수온이 30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열대 바다와 다를 게 없고, 지중해를 둘러싼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남부는 냉각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지중해가 뜨거워지는 이유도 직관적이다. 남쪽은 사하라 사막에서 열풍이 올라오고, 북쪽은 유럽 대륙이 달아오르고 있다. 가운데 있는 바다만 시원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렵다. 유럽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열을 받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이 논쟁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유럽의 에어컨 논쟁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기후를 지키기 위해 에어컨을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더워진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에어컨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한쪽 관점에서 보면, 에어컨이 전기를 소비하고 탄소를 배출해 온난화를 가속하는 건 사실이다. 반대 관점에서 보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늘려 에어컨 전력을 청정하게 충당하는 게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40도가 며칠씩 계속되는 상황에서 "에어컨 금기"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고령자와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생사의 문제다. 프랑스 환경당도, 노동부 장관도 이미 현실을 인정했다. 유럽이 환경 문제에 유독 민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피해 지역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그 유럽이 지금 에어컨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건, 기후 논쟁의 추상적인 언어들이 이제 구체적인 생존 문제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