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땅이 넓어서 집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백악관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주택 부족 수치는 1,000만 채다. 연간 30만 채씩 공급해도 채우는 데 30년이 걸린다. 집값은 2000년 이후 82% 올랐는데 소득은 12% 오르는 데 그쳤다. 이게 미국 얘기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미국 젊은이들은 대학 졸업 후 취직하면 바로 집을 샀다. 지금은 그 나이가 평균 40세다. 3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6.3%를 넘기 때문이다. 집을 살 엄두가 안 나니 임대 수요가 몰리고, 도시 지역 임대료가 폭등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뉴욕의 청년들이 월 600~800달러짜리 수녀원 방을 구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밤 11시 통금에 남성 방문 금지, 음주 금지 조건이 붙어도 임대료가 싸니까 찾는다. 한국의 고시원과 비슷한 풍경이 미국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40대 이하 유권자들이 '내 집 마련'을 가장 큰 관심사로 꼽기 시작했고, 정치권이 움직였다. 상원 85대 5, 하원 358대 32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21세기 주택 로드맵 법안'이 통과됐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손을 잡은 초당적 합의였다.
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수요 억제와 공급 확대.
수요 쪽에서는 사모펀드 같은 대형 기관투자자의 단독주택 추가 매입을 금지한다. 미국에서는 수백 채를 보유하고 임대 수익을 올리는 사모펀드가 주택 시장을 왜곡해왔다. 한국에서라면 여러 규제에 걸릴 행위가 미국에선 합법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공급 쪽에서는 조립식 주택 건설 규제를 완화한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가 없어도 되고, 컨테이너형 구조물도 허용 범위에 들어올 수 있다. 환경 영향 평가 간소화, 용도 변경 절차 단축도 포함됐다. A 건물과 B 건물이 환경 평가를 통과했으면 그 사이 건물은 평가를 생략해주는 방식도 논의됐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이 정도가 대책이라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수십 년 만에 나온 가장 강력한 주택 공급 법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법 관련 법안과 연계해 서명을 보류하면서 현재 법안이 인질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왜 미국은 땅이 넓은데 집이 부족할까? 이유는 여러 겹으로 얽혀 있다.
첫째, 건설비 급등이다. 재료비와 인건비가 크게 올랐다. 둘째, 각종 인허가와 용도 제한 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착공까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셋째, 미국 주택의 61%가 단독주택이다. 10명 중 6명이 각자의 마당과 주차장이 딸린 집에 산다. 같은 면적에 30배 이상의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고층 아파트와는 토지 효율 자체가 다르다.
실제로 텍사스 오스틴은 지하철·버스 정류장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를 공급하는 정책을 시험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오스틴의 임대료는 지난 1년 동안 6% 하락하며 미국 주요 도시 중 가장 높은 하락률을 기록했다. 공급을 늘리면 가격이 내려간다는 기본 원리가 작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아파트 공급을 망설이는 걸까. 단순히 땅이 넓어서가 아니다.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다.
1940~50년대 미국은 슬럼가를 철거하고 공공주택 아파트를 건설하는 정책을 폈다.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여력이 있는 백인 중산층은 교외 단독주택으로 빠져나갔고, 저소득층과 유색인종만 아파트에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가 안 되고, 아파트는 빈민촌의 상징이 됐다.
1970년대에는 그 대형 아파트 단지들을 다시 밀어버렸다. 이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외곽 단독주택 지역 주민들은 "우리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오면 범죄율이 높아지고 집값이 떨어진다"고 반발한다. 한국에서 낡은 아파트가 오히려 재건축 기대감에 더 비싸지는 논리와는 정반대다.
미국 주택 위기의 숨겨진 원인으로 지목된 게 하나 더 있다. 엘리베이터 문제다.
뉴욕시에서 4층짜리 건물에 엘리베이터 한 대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억 4,500만 원이다. 스위스의 약 5,000만 원과 비교하면 거의 4배 수준이다. 비용이 이러니 소규모 건물 개발업자들은 엘리베이터 설치 자체를 꺼린다.
왜 이렇게 비쌀까. 미국과 캐나다는 전 세계가 따르는 유럽 표준 대신 독자적인 엘리베이터 규격을 쓴다. 외국산 엘리베이터를 그대로 수입해 설치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강력한 엘리베이터 건설 노조가 공장 사전 조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완성품을 만들어와 현장에서 설치만 하면 조합원의 일거리가 사라진다는 이유에서다.
노조 협약에 따르면 공장에서 조립된 제품이라도 현장에서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야 한다. 조합에 새로 들어오려면 기존 조합원 전원이 일자리를 확보한 뒤에야 신규 채용이 가능하다. 주마다 면허가 달라 지역 간 이동도 제한된다. 견습 기간은 3년이다.
그 결과, 미국 기술직 평균 연봉 순위에서 엘리베이터 기술자는 늘 상위권이다. 평균 연봉 13만 달러 이상으로 용접공(14위)보다 훨씬 높다. 이 직종이 "AI도 대체 못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있다. 현장 조립이라는 노조 협약 구조 때문에 자동화나 공장화 자체가 막혀 있어서다.
이러다 보니 미국 저층 아파트 상당수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한 대만 있다. 3~5층 거주자는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당한 높이의 중층 아파트 공급이 막히는 구조적 원인 중 하나가 엘리베이터 비용인 셈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도 '한국형 K아파트' 모델이 거론된다. 같은 땅에 30~100배의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고밀도 아파트, 빠른 건설 속도, 풍부한 편의시설, 그리고 낡을수록 재건축 기대감에 가격이 오르는 독특한 가치 구조.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모르는 외국인은 낡은 아파트 단지를 빈곤의 상징으로 읽는다. 하지만 서울 주요 지역의 오래된 아파트는 재건축 프리미엄을 포함해 40억 원을 넘기도 한다. 낡았기 때문에 더 비싼 역설이다.
물론 미국이 이 모델을 받아들이려면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역사 인식, 기존 단독주택 주민들의 반발, 엘리베이터 노조와 독자 규격 문제, 복잡한 인허가 절차. 텍사스 오스틴의 실험이 증명했듯 공급을 늘리면 가격은 내려간다는 원리는 미국에서도 통한다. 문제는 그 공급을 가로막는 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다.
법안은 통과됐지만 서명은 막혀 있다. 인식은 바뀌어야 하지만 역사는 무겁다. 미국의 주택 문제는 단순히 공급이 부족한 게 아니라, 공급을 막는 구조가 여러 층으로 쌓인 문제다. 그 구조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시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오스틴이 이미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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