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은 짓고 있는데, 거기에 공급할 전기는 15년 뒤에나 온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한전의 실제 데이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전력 위기가 어느 수준인지,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따져봤다.
전기가 병목이다 — 일론 머스크가 먼저 간파한 것
AI 산업 전체에서 HBM 메모리가 병목을 잡고 있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런데 그 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가는 데이터센터의 병목은 무엇일까. 일론 머스크는 이 질문에 일찌감치 답을 내놨다. 데이터센터 자체는 2~3년이면 지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데이터센터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망, 즉 그리드다. 그리드를 깔려면 10년이 넘는다. 그 사이 데이터센터는 계속 늘어나지만, 전력망은 따라가지 못한다. 머스크가 우주에 데이터센터를 올려 태양광을 쓰겠다고 한 것도 이 맥락이다. 지상 그리드를 기다릴 수 없으니, 차라리 우주로 가겠다는 계산이었다. 이 논리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반도체 공장이 아무리 빨리 지어져도, 전기가 적시에 공급되지 않으면 공장은 돌아가지 않는다.
한전 리드타임의 실체 — 목표는 8년, 현실은 15년
한국은 법적으로 한전이 최종 소비자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비율이 99% 이상이다. 한전의 공식 리드타임을 보면, 고전압 송전망을 건설하는 데 최소 8년, 대용량 사용자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데는 기본 5년 이상을 잡는다. 그런데 이것은 한전의 내부 목표치일 뿐이다. 실제 최근 사례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송전망 건설은 8년이 아닌 15년으로 늘어났고, 대용량 공급도 5년이 아니라 7~8년으로 지연되고 있다. 지연의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이 아니다. 민원이다. 발전소나 송전망이 집 근처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반대하면서 건설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도 오른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땅이 넓어 발전소를 자유롭게 지을 것 같지만, 도심 가까이 발전소가 접근할수록 주민 반발이 커지고, 규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물리적 제약과 사회적 제약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전력 공급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용인 클러스터가 필요한 전기, 20GW라는 숫자의 의미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용하는 전력을 합하면 몇 GW 수준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계획대로 완공되면 그 클러스터 하나에서만 20GW 이상의 전기가 필요해진다. 이게 얼마나 큰 숫자냐면, 우리나라가 날씨가 극단적이지 않은 평상시에 쓰는 전체 전력이 약 80GW 수준이다. 좁은 지역 하나에서 그것의 25%에 달하는 전기를 소비한다는 얘기다. 이 수요를 감당하려면 송전선이 최소 8개 이상 새로 지어져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15년짜리 프로젝트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속도가 생명인데, 전력망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구조다. 여기서 또 하나 구분이 필요하다. 용인 클러스터의 최종 핵심은 메모리 반도체가 아니라 파운드리와 로직 반도체다. 로직 반도체 공정에는 EUV 장비가 더 많이 들어가고, EUV 장비 한 대가 소비하는 전기는 수만 명이 쓰는 수준이다. 메모리 위주로만 간다면 그나마 전력 문제가 덜 심각하지만, 애초 계획대로 TSMC를 능가하는 파운드리까지 간다면 전력 공급은 그때까지 맞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RE100 압박 — 애플이 2030년까지 요구하는 것
전력 문제는 공급량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전기를 쓰느냐'의 문제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애플은 이미 몇 년 전에 공표했다. 2030년까지 자신에게 납품하는 모든 제조 공급사들이 탄소 중립과 RE100을 이행해야 한다고. 매년 보고서를 받고, 사정없이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RE100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국내에서 재생에너지를 가장 많이 원하는 기업이 누구냐고 물으면 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국내 재생에너지가 생기면 이 두 회사가 가장 먼저 달려가서 사간다. 이미 그렇게 몇 년째 움직이고 있다. TSMC는 더 앞서가고 있다. 직원 성과급을 12%에서 10%로 낮추고, 그 돈으로 장기 풍력 전력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들이 실현되면 TSMC의 RE100 이행률은 삼성전자보다 훨씬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왜 그럴까? 지금 반도체가 AI 시장의 병목을 쥐고 있는 동안 숙제를 미리 해두는 것이다. 반도체 공급 과잉 사이클이 돌아왔을 때, 그때 RE100 압박이 다시 본격화되면 준비가 안 된 기업은 거래에서 밀려난다.
재생에너지가 비싸다는 착각 — 문제는 가격이 아니라 구조
"한국은 재생에너지가 비싸잖아요"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국내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180~220원 수준이다. 반면 태양광 발전원가는 현재 120~130원 수준까지 내려와 있다. 발전원가는 이미 전기요금보다 낮다. 그런데 기업들이 태양광 전기를 살 때는 180원을 내고 있다. 발전원가와 구매가격 사이에 60원의 갭이 생기는 이유는 가격이 비싸서가 아니라 시장 구조 때문이다. 공급자 주도의 시장 구조, 공공 수요와 민간 수요가 경합하는 구조 때문에 기업들은 저렴한 태양광을 비싸게 사고 있다. 이 구조만 개선되면 기업들은 지금보다 훨씬 저렴하게 재생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 정부는 2030년대 초반을 목표로 태양광 시장 단가를 kWh당 100원 이하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불일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120~130원짜리 태양광이 몰려 있는 지역은 전남, 전북, 경북, 경남 남부다. 반도체 공장이 몰려 있는 경기도 수도권에는 그 전기가 없다. 전기를 끌어오려면 송전망이 필요하고, 그 송전망을 짓는 데 또 15년이 걸린다.
총량이 아니라 지역 미스매치가 핵심 문제다
우리나라 국민이 전기가 부족하다고 느낀 경험은 거의 없다. 한국은 전력망을 잘 운영해온 나라다. 여름 폭염 때 에어컨 수요가 몰리면 잠깐 아슬아슬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전기 총량이 부족한 게 아니다. 어떤 지역에 어떤 에너지원이 있느냐의 문제다. 강원도에 지어진 석탄발전소가 송전 제약 때문에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 동해안에 새 원전이 들어올수록 수도권으로 송전하기는 더 힘들어진다. 발전기가 있는 곳에 수요가 가든가, 수요가 있는 곳에 전력이 가든가, 둘 중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 총량의 부족이 아니라 원하는 지역에 원하는 전원을 공급하는 것이 앞으로의 핵심 과제다.
용인 클러스터, 지금 당장 속도를 올려야 하는 이유
전문가들은 한 가지를 강조한다. 용인 클러스터는 지금 당장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지금 물이 들어오는 타이밍이다. 모터를 달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 누군가가 대안을 찾을 것이다. 우리가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외국 기업들은 한국이 믿을 만하게 공급할 수 있는지를 보고 있다. 계획을 계속 바꾸고, 전력 공급 불확실성이 높다는 인상이 생기면 다른 공급처를 찾는다. 그 선택지 중 하나가 TSMC다. 단기적으로는 메모리 위주의 1단계 클러스터를 계획대로 진행하면 전력 수급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파운드리까지 포함한 세계 최대 규모의 클러스터를 밀어붙이겠다면, 그 시점까지 전기 공급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2단계 이후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솔직한 판단이다.
에너지 전환이 당위가 아닌 '생존'이 된 이유
한국은 매년 화석연료를 사기 위해 국가적으로 200조 원이 넘는 외화를 지불한다.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질 때마다 화석연료 가격이 폭등하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한전과 에너지 공기업이 흡수한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두 에너지 공기업이 합쳐 70~80조 원의 피해를 입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식량과 에너지, 이 두 가지 모두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나라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기후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추는 국가 생존 전략이다. 이것이 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원전을 국가적으로 밀어붙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재생에너지 전환의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려면, "RE100 이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도체 산업을 키우려면 필요하다"는 프레이밍이 더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들이 직접 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어디에 비즈니스 기회가 있나
전문가들이 꼽은 유망 영역은 두 가지다. 첫째, 재생에너지 전문 중개회사다. 영세한 발전사업자와 대기업 수요자 사이의 불확실성을 흡수하고, 계약 리스크를 떠안으면서 적정 마진을 가져가는 구조다. 계약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국내 시장에서 이 중간자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둘째, 해상풍력이다. 태양광만으로는 RE100을 채울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해상풍력은 하나의 프로젝트가 수백MW 단위까지 가능해 대규모 장기 PPA 계약이 가능하다. TSMC가 장기 폭력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도 대만의 해상풍력이 가격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한국도 하부 구조물과 타워 분야에서 이미 경쟁력이 있고, 해상풍력 특별법 제정으로 규모화와 가격 하락의 조건이 서서히 갖춰지고 있다. 에너지 문제를 부담으로만 보지 말고, 반도체 산업의 지속을 위한 인프라이자 새로운 산업 기회로 함께 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