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가 45년 만에 162엔을 넘었다. 일본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찍고 외국인 자금이 역대 최대 규모로 유입됐는데, 왜 일본 국민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있을까. 숫자 하나하나가 따로 놀 것 같지만, 이 구조를 이해하면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 편의 딜레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외국인 자금 100조가 몰렸는데 왜 엔화는 더 약해졌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외국인이 일본 주식을 사려면 엔화가 필요하고, 엔화 수요가 늘면 엔화 강세가 와야 한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외국인의 일본 증시 순매수액은 사상 최고치인 약 100조 원을 넘겼다. 같은 기간 한국에서 110조 원, 대만에서 30조 원이 빠져나간 것과 정반대 흐름이었다. 그런데 엔화는 강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달러에 162엔까지 떨어졌다. 이유는 외국인들이 일본 주식을 사면서 동시에 엔화 매도 헤지를 걸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일본 주식은 사고 싶지만, 엔화 강세에 돈을 걸고 싶지는 않다는 판단이다. 이른바 '다카이치 트레이드'라 불리는 포지션이다. 니케이 강세와 엔화 약세에 동시에 배팅하는 구조, 그리고 한국·대만 매도와 일본 매수를 연동하는 리밸런싱이 맞물리면서 엔화 숏 포지션은 오히려 계속 쌓이고 있다.
엔화 약세는 왜 시작됐나, 아베노믹스라는 시한폭탄
엔화 약세의 뿌리는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베 총리의 '세 개의 화살', 무제한 양적완화·대폭적 재정확대·적극적 성장정책이 등장하면서 25년간 이어진 엔화 강세 흐름이 끊겼다. 일본은행이 찍어낸 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2020년에는 미국 연준의 자산 규모를 추월했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면 일본은행이 돈을 찍어 사주고, 그 돈으로 또 채권을 발행하는 무한반복 구조였다. 덕분에 일본 금리는 0% 수준으로 내려갔다. 더 놀라운 건 일본 중앙은행이 직접 주식 ETF를 매입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 주식시장의 7% 이상을 일본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구조로, 이 포지션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가 터지자 전 세계가 금리를 올리는 동안 일본만 홀로 0% 기준금리를 유지했다. 미국이 5%를 넘길 때도 일본은 꼼짝하지 않았다. 미일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서 엔화는 100엔에서 160엔대까지 날아갔다.
150엔 고지 전투는 왜 실패했나
일본 정부는 한때 150엔 라인을 사수하겠다고 사실상 공언했다. 150엔을 넘으려 할 때마다 정부가 개입해서 눌렀다. 이 공방이 3년 가까이 이어졌다. 결국 그 라인이 올해 뚫렸다. 160엔도 돌파했다. 일본 정부는 4월과 5월 역대 최대 규모인 728억 달러, 원화로 약 100조 원에 달하는 시장 개입을 단행했지만 흐름을 되돌리지 못했다. 엔화 약세를 더 심화시킨 건 2025년 취임한 다카이치 총리다. 스스로를 '여자 아베'라고 부를 만큼 아베노믹스 계승을 전면에 내세운 인물로, 취임 직후 3,400조 원 규모의 민간 투자 전략을 발표하는 등 확장적 재정 정책을 이어갔다. 동시에 일본은행 정책위원 인사에서 금리 인상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인물을 첫 번째로 임명하는 등 비둘기파 인사들을 잇달아 앉혔다. 내년에도 두 명의 위원 임기가 만료되어 추가 임명이 가능하다. 이 모든 시그널이 시장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일본은 금리를 빠르게 올리기 어렵다. 최근 일본 당국이 꺼내든 카드는 '전술적 침묵'이다. 기존에는 외환 개입 전에 시장에 미리 알려주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전 예고 없이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언제 개입할지 모르니 함부로 엔화 약세에 돈을 걸지 말라는 압박 전술이다. 하지만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1조 달러를 넘는다 해도, 개입만으로 구조적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다.
주가는 오르는데 일본 국민은 왜 가난해지나
여기서 핵심 모순이 등장한다. 니케이가 7만 포인트에 육박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일본 국민들은 4년 연속 실질임금이 하락했다. 구조는 단순하다. 엔화 약세로 수입 물가가 오른다. 물가가 오르는데 성장률은 낮으니 임금이 충분히 오르지 않는다. 물가 상승률이 임금 상승률을 앞서면 실질임금은 떨어진다. 현재 일본의 성장률 전망치는 0.5%, 물가 상승률은 2%대 중반이다. 물가는 높고 성장률은 낮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초기 신호로 읽히는 수치다. 임금이 안 오르는데 자산 가격은 오른다. 그러면 선택지는 투자밖에 없다. 일본에서 '밥을 굶더라도 주식에 투자한다'는 표현이 실제로 나오는 배경이다. 이른바 NISA 거지, 일본 젊은이들이 주식 투자에 너무 많은 돈을 넣느라 다른 소비를 못 한다는 현상이다. 가만히 있으면 실질 자산 가치가 깎이니 투자 열풍이 이성적 선택이 된 것이다. 엔화 자산을 들고 있는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달러 기준으로 보유 자산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글로벌 구매력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엔화 약세를 되돌릴 수단이 있기는 한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구조를 바꾸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금리를 빠르게 올리거나, 재정 지출을 줄이거나, 양적완화로 쌓은 자산을 줄이거나. 그런데 아베노믹스 계승을 내건 총리 아래에서 이 세 가지 모두 하기 어렵다. 잃어버린 20년의 트라우마가 있는 일본이 고강도 긴축을 택할 경우, 다시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쌓아놓은 자산을 섣불리 줄였다가 국채 금리가 폭등하면, 그 순간 환율이 200엔을 향해 날아갈 수도 있다. 현실적인 탈출구로 남은 건 GDP를 올리는 것이다. GDP 대비 자산보유 비율을 낮추려면 분자인 자산을 줄이거나 분모인 GDP를 키우면 된다. 줄이기 어려우면 키워야 한다. 일부에서 AI가 엄청난 성장률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논리를 내놓는 것도 이 맥락이다. 실제로 일런 머스크가 AI와 로봇이 GDP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켜 부채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같은 구조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까지 2~3년 이상이 걸린다면, 그 사이 일본 국민이 겪을 실질임금 하락과 물가 상승의 압박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편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일본 여행 비용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5~6년 전 100엔 수준이던 환율이 160엔대가 됐으니, 일본 여행 비용이 60%가량 저렴해진 셈이다. 원화도 약해졌지만 엔화가 더 약한 덕분에 일본이 한국인의 해외여행 1순위가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반대로 일본인에게는 해외여행, 특히 달러 기반 여행지는 사실상 사치가 됐다. 지금 일본이 보여주는 건 돈을 너무 많이 풀었을 때 어떤 구조적 덫에 빠지는지에 대한 실증 사례다. 통화가 약해지면 여행자는 몰려오고, 주가는 오르고, 외국인 자금도 들어오지만, 정작 그 나라 국민의 생활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